2006년 10월 10일
로버트 하인라인의 '프라이데이'를 읽고 난 잡상
저는 어떤 장르 문학이라도 치밀하게 장르의 특성을 극도로 일구어낸 작품이나, 혹은 그 장르를 이용해서 유쾌하게, 때로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 두 가지 모두를 좋아합니다. SF건, 추리물이건, 판타지이건 마찬가지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 장르문학만의 특성, 감성과 낭만을 듬뿍 담고 있는 명쾌한 작품"들입니다. 가장 비중을 두고 있는 기준은 '낭만'과 '명쾌'죠. 명쾌하다고 하는 건 깊이 없는 단순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플롯의 설득력과 논리적인 구성에 대한 기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장 낭만적인 SF'로 꼽고 있는 칼 세이건의 '컨택트'는 치밀한 과학적인 구성에다 과학자, 천문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을 너무나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기에 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아시모프의 작품들 역시 저는 로봇에 대한 낭만적인 감상이 듬뿍 들어있는 따뜻하고 즐거운 SF로 분류하고 있으며, 심지어 가장 하드한 SF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는 할 클레멘트의 '중력의 임무'까지도 제게는 가장 치밀하고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보겠다는 SF작가의 야심이 가득한, 그리고 그것이 잘 표현된 명쾌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논리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SF적 감성을 극도로 유쾌하게 풀어낸, 그 비논리적임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의 논리가 될 정도로 어이없음이 너무나 큰 매력이 되는 걸출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 외에도 좋아하는 작품은 수도 없이 많지만, 일단 하인라인에 대한 얘기를 하려하는 것이니 본론으로 들어가 보면...
로버트 하인라인은 정말 극과 극으로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과, 제가 너무나 싫어하는 작품들을 모두 써낸 작가입니다. 유쾌한 상상력으로 너무나 즐겁게 보았던 '은하를 넘어서'라던가, 군국주의만 적당히 걷어내고 보면 그야말로 재미가 넘쳐나는 '스타쉽 트루퍼스',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 하위장르중 하나인 타임 패러독스를 너무나 흥미롭게 풀어낸 '여름으로 가는 문' 등등 정말 낭만적인 감성을 자극하거나 혹은 유쾌한 즐거움을 주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인라인은 제가 가장 재미없게 본 SF인 '스트레인저'를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종류의 장르문학이 바로 뉴에이지, 특히 60년대 히피의 정신적인 감수성이 묻어나는 선문답이거든요. (특히 '몽환적'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작품들은 예외없이 다 싫어하는 편입니다) 한 마디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요. 특히 하인라인의 말년 작품들에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저는 제게 재미없는 책을 읽으면 정말로 "신체적인" 반응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멀미 비슷하게 속이 메슥메슥해지거든요 -_-; 한 번 잡은 책은 끝까지 보아야만 하는 성미 때문에 끝까지 그 멀미를 참으면서 다 읽기는 하지만, 그 후로는 절대 다시 그 책을 잡지 않죠. 그리고 '스트레인저'는 제게 수준급의 멀미를 안겨주었던 작품으로 제게 남아있습니다. (몇 년 전 선풍적인 베스트셀러였던 '연금술사'를 제목에 혹해서 한 번 사읽었다가 느꼈던 멀미에 이어 2위라고나 할까요 -.-)
그래서 얼마전, 서점에 들렀다가 하인라인의 '프라이데이'라는 작품이 출간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표지 뒤에 당당하게 적혀 있는 '하인라인의 후기 걸작'이라는 표현 때문에요. (초기 걸작이라고 적혀 있었으면 전혀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ㅡ_-) 하지만 안 그래도 마이너한 SF 출판 시장에서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구하기 힘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예전에 사람들끼리 돌려보다가 잃어버린 제가 좋아하는 수많은 SF책들... 다시 구할 길이 없어 너무 슬픕니다 ㅠ_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사버렸습니다.

꽤 흥미진진했습니다. 초반에는 하인라인의 청소년 SF인 '초인부대' 삘도 많이 나고 꽤나 스피디하게 진행되는 첩보물이었고 유쾌한 상상력도 역시 하인라인은 늙어서도 빛이 바래지 않는 작가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반 넘어서부터는 살짜기 멀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더군요. 스토리가 재미없는 방향으로, 아니 그보다는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거든요. 대안적인 가족 형태들을 좀 거슬린다 싶을 정도로 부각시키고 있었고, 제게는 도무지 설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 대안의 우수함을, 사랑을, 행복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스트레인저에서 제가 주인공이 '구루'임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 때부터 좀 김이 새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본래의 첩보물의 형태로 돌아가는가 싶은 순간, 역시나 전혀 저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우연으로 갑작스러운 해피 엔딩을 맞이해 버렸습니다. 무언가 음모가 있는 것처럼 크게 부풀려놓고서는... 수습도 하지 않은 채...
인조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평들이 대부분인데... 이제는 그런 스토리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탓일까요. 제가 보기엔 정체성을 찾는다기 보다는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안적인 가족 형태를 통해 안정과 행복과 사랑을 찾게 된다는(이것도 어찌보면 정체성을 찾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제 기준에는 다분히 히피스러운 결론이었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는 소설이라면 정말로 환영하지만, 자신의 프로퍼갠다를, 특히나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독자에게 고상한 척 설교하는 건 딱 질색입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군국주의에 쩔어 있음에도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그 명쾌함, 거의 반어적인 조롱으로 보일 정도의 뻔뻔스러움이 오히려 밉지 않고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하인라인의 소설은.... 초중기 것으로 찾아보아야겠다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다시 얻어버렸습니다.
# by | 2006/10/10 22:43 | 읽은 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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